2025. 7. 15. 01:42ㆍ히스토리

1978년 1월, 한국 영화계의 전설적인 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행방은 아무런 예고나 연락 없이 완전히 묘연해졌고,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연일 대서특필되며 사회에 큰 충격과 혼란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랜 예술적 동지이자 전 남편인 신상옥 감독은 충격에 빠진 채 직접 홍콩으로 향해 그녀의 소식을 찾기 시작했으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신상옥 감독마저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1953년, 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는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한 부부 관계를 넘어 한국 영화계의 혁신적인 창작 파트너십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함께 ′신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과 기획에 적극 참여하며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고, 한국 영화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상옥 감독은 사회 현실과 인간 내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내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이루는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제한적이던 시대에 최은희는 공동 제작자로서 기획과 제작에 적극 참여하며 여성 영화인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친자식은 없었지만 신정균과 신명희를 입양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예술과 일상을 함께 나누며 오랜 시간 예술적 동반자로서 삶을 이어갔다.
이처럼 두 사람의 연쇄 실종은 대한민국 영화계뿐 아니라 국민 모두를 깊은 어둠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조용한 실종이 단순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냉전 시대의 그림자 아래 벌어진 거대한 음모와 서사의 서막이었다는 사실을.
김정일, ′신필름′에 빠지다

이 기막힌 사건의 서막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4 남북공동성명이 오가던 여름, 평양을 방문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김정일에게 선물했다. 영화를 본 김정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구성, 연기, 세계관 모든 것이 북한 영화보다 뛰어났고, 북한이 갖고 싶어 하던 예술의 정수가 그 안에 있었다. 선전선동 도구로만 기능하던 <피바다>, <꽃 파는 처녀> 같은 ′혁명영화′ 는 지루하고, 진부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달랐다. 오롯이 ′혁명영화′에 집착하던 김정일은, 북한 내부의 역량만으로는 세계적인 수준의 예술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상 북한 영화가 남한보다 뒤처졌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남한의 뛰어난 영화인을 납치하여 북한 영화 산업을 재건하겠다는 충격적인 발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북한의 타깃이 된 부부

1977년, 북한 공작원들은 첫 타깃으로 대한민국의 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를 정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명성을 지닌 예술가로, 국제무대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북한은 이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특히 윤정희가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국제 영화제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 국제 영화제를 기회 삼아 윤정희 부부를 납치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행사장 주변과 동선 곳곳을 감시하며 타이밍을 노렸다. 그러나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는 북한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기민하게 대처했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미국 대사관으로 몸을 피했고, 그곳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국제적인 망신까지 당한 김정일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의 시선은 신상옥·최은희 부부에게로
허나 그 시기,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이별>에 출연한 신예 여배우 오수미를 만나게 되었다. 이국적인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로 주목받던 그녀는 신상옥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두 사람은 점차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했다. 결국 신상옥 감독은 오수미와 동거를 시작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 사실은 영화계에 큰 충격을 안겼으며, 그의 아내이자 오랜 예술적 동지였던 최은희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오랜 세월 함께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면서 부부로서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던 1976년,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으며 사실상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이했다.
그리고 북한은 이 혼란스러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 영화계를 대표하던 부부가 분열되고 있다는 사실은 김정일에게 절호의 기회로 비쳤다. 그는 두 사람의 갈등과 틈을 철저히 분석했고, 개인적인 불화 속에서 북한 체제를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했다. 이에 북한은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포섭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완벽한 유인
신상옥과의 결별 이후, 최은희는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안양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며 후배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배우로서의 활동이 다소 줄어든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한국 영화계의 원로이자 교육자로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새로운 작품과 기회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그녀의 상황이 북한의 눈에 포착되었다.
′최은희만을 납치하면 신상옥은 필시 찾아올 것′이라고 판단한 북한. 당시 신필름 홍콩지사에 근무하던 중국 교포 공작원 이영생은 북한 당국에 두 사람 모두를 납치할 수 있다는 계획을 보고했고, 이에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되자, 홍콩에 체류 중이던 공작원 이상희는 이영생이 매수하였던 신필름 홍콩지사장 김규화를 통하여 중국 국적의 영화 브로커 왕동일을 포섭했다. 왕동일은 곧장 서울로 입국하여 충무로의 호텔과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예술학교 등을 방문, 최은희와 관계자들과 접촉하며 영화 <양귀비> 출연 논의를 명목으로 그녀의 홍콩 입국을 제안했다. 결국 그해 12월, 왕동일은 홍콩 카니발 초청장을 명분 삼아 그녀를 홍콩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1978년 1월 14일, 홍콩의 그림 같은 해변, 래펄스 베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 나타난 인물은 자신을 영화 투자자라 소개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용모는 단정했고, 말투는 지극히 신사적이었으며, 그의 눈빛에서는 성공적인 사업가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는 최은희에게 구체적인 영화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그 규모와 내용이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규모 기획이었다. 그는 이 중대한 논의를 위해 좀 더 은밀하고 집중할 수 있는 장소, 바로 마카오로 동행하여 구체적인 사항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낯선 제안이었음에 틀림없었으나,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 속에는 왠지 모를 신뢰감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최은희는, 비록 남편 신상옥과의 관계가 파국을 맞고 배우로서의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가슴 한편에는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증과 영화인으로서의 재기를 향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제안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와 같았으며, 침체되었던 자신의 영화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절호의 기회처럼 비쳤다.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 달콤한 제안에 이끌려 마카오로 향하는 배에 조용히 몸을 실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배가 자유와 새로운 시작을 향한 길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미지의 세계, 즉 북한으로 향하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발걸음은 희망을 좇았으나, 사실은 거대한 음모의 심연 속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의 덫이었다. 망망대해 위, 배가 깊은 바다로 나아가던 중, 아무런 징조도 없이 몇몇 낯선 남성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고도 위협적인 움직임으로 그녀를 에워쌌고, 아무런 설명이나 유예도 없이 그녀를 다른 배로 강제로 옮기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붙들린 그녀는 극심한 공포와 당황스러움 속에서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허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모든 혼란과 저항을 단숨에 정지시키는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

곧 그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천이 덮였고, 차가운 마취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의 의식은 마치 안개처럼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꺼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그녀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방의 벽에 걸려 있는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였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그녀는 다시금 혼란과 공포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북한 황해남도 해주의 남포항에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김정일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내레 김정일입니다.

김정일은 그녀를 환대했다. 마치 오랜 지인을 대하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였고, 그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허나 최은희는 이미 납치라는 충격과 공포 속에서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며칠간의 감금과 이동, 그리고 마취제의 잔여 기운이 그녀의 온 정신을 슬픔과 혼란 속에 잠기게 하였으며,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본 김정일은 그녀가 겪은 고난을 뱃멀미로 오인한 듯, 측근들에게 ′최은희 동지가 뱃멀미를 하는 듯하니, 바람을 좀 쐬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정일은 자신의 고급 벤츠에 그녀를 태우고 직접 평양까지 동행했다. 이 짧지 않은 여정 동안 최은희는 더욱 깊은 공포에 휘말렸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질문이 맴돌았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가? 왜 이토록 극진히 대접하는가?′ 그들의 친절함은 오히려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기묘한 역설로 작용했다. 죽음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섬뜩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직감하였기 때문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그녀는 곧바로 호화로운 고급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매일 정갈하고 풍성한 식사가 때맞춰 준비되었으며, 모든 편의가 제공되었다. 김정일은 틈만 나면 직접 그녀를 찾아와 안부를 묻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친절했고, 최고 수준의 예우를 갖춘 행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최은희는 그 모든 정성스러움 속에서 점차 알 수 없는 종류의 공포를 느꼈다. 그 모든 환대와 극진함이 오히려 그녀를 옥죄는 거대한 감옥의 일부처럼 느껴졌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친절은 단순한 호의가 아닌, 거대한 음모의 서막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렇게 납치된 지 약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최은희는 김정일이 특별히 마련한 회식 자리에 초대되었다. 그 장소는 화려하면서도 밀폐된 공간이었고, 북한 고위 관계자들이나 측근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녀가 도착하자, 김정일은 직접 현관 앞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너그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마치 오랜 지인을 반기듯 친근한 태도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다소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농담을 건넸다.
최 선생! 날 좀 보라요.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
예상치 못한 그의 자조적인 발언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은 마치 정해진 각본이라도 있는 듯 일제히 어색하고도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최은희의 눈에 비친 김정일의 모습은 오히려 이상하고 기괴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납치한 장본인이자 모든 권력을 쥔 이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듯한 농담을 던지는 상황은 그녀에게 깊은 불쾌감과 함께 예측 불가능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며,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연극의 무대에 강제로 올려진 배우가 된 듯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분위기를 전환하고, 그녀에게 유쾌하고 친근한 인상을 심어주려 했던 듯 보였다. 그의 의도는 명백하였으나, 최은희에게는 그 친절과 농담마저도 자신을 옥죄는 거대한 속박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김정일의 계획 속에서 철저히 이용될 도구임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 자리는 환대와 친절로 포장되었으나, 실상은 그녀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현실을 재확인하는 잔인한 시간이었다.
그녀를 찾아서
한편, 신상옥은 홍콩에 있던 신필름 홍콩지사장 김규화로부터 충격적인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최은희의 실종 소식이었다. 비록 이미 별거 중이던 두 사람이었으나, 그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일정을 접고 곧장 홍콩으로 달려가 최은희의 실종 전후 상황을 소상히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상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오래된 의심이 단순한 기우가 아닌, 섬뜩한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을 품게 되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는 곧바로 미국, 일본, 대만, 프랑스, 인도네시아 등지를 전전하며 그녀의 행방을 끈질기게 수소문하였지만, 그러나 아무리 뒤를 쫓고 수소문하여도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3년간 삶과 예술을 함께 나눈 동반자이자, 자신이 만든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한때 그의 삶과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여인. 신상옥, 그는 그녀를 마음속에서 결코 놓지 못했다.
결국 1978년 7월 14일, 기약 없는 수소문 끝에 신상옥은 마지막 희망의 불씨라도 더듬어 보고자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불씨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닷새 후인 7월 19일, 그의 거처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북한 공작원들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그에게 접근했고, 그날 밤, 신상옥은 홍콩 어딘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그의 이름 역시 실종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으니…

두 번의 탈출, 4년의 감금
북한으로 끌려간 신상옥 감독은 김정일의 온갖 회유와 집요한 세뇌 공작에도 불구하고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굳건히 지키려 하였으며, 북한 체제에 동조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단호한 태도는 김정일에게 좌절감을 안겼고, 신 감독은 두 차례에 걸쳐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다. 허나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평양시 승호리에 위치한 보위부 수용소에 끌려가 무려 3년 10개월이라는 절망적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혹독한 감시와 비인간적인 환경의 연속이었다. 강제 노역과 정신적 압박은 그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그 속에서 신 감독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한 번은 그의 몸 상태가 심각해져 간 생체조직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제대로 소독되지 않은 의료 기구를 사용하는 바람에 그는 치명적인 C형 간염에 감염되고 말았다. 이 감염은 그의 남은 여생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투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 이는 북한에서의 강제 억류가 남긴 지울 수 없는 상흔이었다.
신상옥의 고집과 단호한 태도, 그리고 오랜 수용 생활에도 꺾이지 않는 정신력 앞에서 김정일은 더는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그를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략을 바꾸어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신 감독을 석방하여, 그가 평양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최은희와 극적인 재회를 하게 만든 것이다. 김정일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부부 관계를 넘어 한국 영화계의 거대한 상징이었음을 간파하였고, 그들의 재회를 통해 북한 영화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교활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재회, 그리고 북한에서의 삶
1983년 10월 19일, 최은희가 납북된 지 5년 만에, 북한 당국은 ′북한 영화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두 사람의 재회를 허락했다. 김정일의 별장에서 이루어진 극적인 상봉이었다. 최은희는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억눌린 감정이 신상옥을 보자마자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수용소 생활로 깡마른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뜨거운 눈빛을 지닌 신 감독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신상옥 역시 새로운 다짐을 했다. 자신의 방황과 그로 인해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에 대한 속죄로서, 앞으로의 삶은 오직 그녀를 향한 헌신과 탈출을 위한 여정이 될 것이라고.

평양에서 다시 영화 작업을 시작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필름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북한 체제 선전의 도구이자 동시에 북한 영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핵심 인력으로 활용되었다. 두 사람은《돌아오지 않는 밀사》,《소금》,《사랑 사랑 내 사랑》등을 비롯해 총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중에서도 괴수 영화《불가사리》는 일본의 고질라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북한판 특수효과와 체제 메시지가 결합된 독특한 시도로 평가받았다.

또한, 최은희가 주연을 맡은《소금》은 19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은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북한의 문화 외교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고, 외부에는 북한에서 예술적 성공을 마음껏 누리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집요한 감시와 통제 속에 있었으며, 겉으로 주어진 모든 자유는 체제의 허락 아래에서만 존재하는 가짜 자유였다. 그들에게 예술은 허락되었으나, 진정으로 숨 쉴 공간은 없었다.

북한 당국의 감시는 끝까지 집요하고 철저했다. 김정일은 그들을 예술가로서 존중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철저히 통제했다. 최은희가 부다페스트에서 담석 수술을 받을 때조차 부부 동반은 허용되지 않았고, 그녀는 홀로 치료를 위해 해외로 나가야 했다. 신상옥 감독 또한 비엔나, 프라하, 부다페스트 등 유럽 도시들을 오가며 영화 관련 일정을 이어갔지만, 언제나 경호원 겸 감시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외로운 단독 일정이었다. 이는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북한 당국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러던 1986년, 북한은 처음으로 신상옥·최은희 부부 동반 해외 참석을 허용했다. 행선지는 서독 베를린,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모이는 유서 깊은 국제영화제의 무대였다. 언제나 따로 움직이며, 감시자의 시선 아래 제한된 교류만 허락되던 그들이 이번만큼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단위로 세상 앞에 나설 수 있었다. 이는 북한 당국으로부터의 일종의 신뢰 표시였으며, 동시에 두 사람의 대외적 활용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김정일의 의도이기도 했다.

너 지미 아니냐. 정말 반갑다!
1986년, 서독 베를린. 제3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그날 밤,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축제의 장에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배우 김지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스크린을 통해 한국 영화계를 빛내온 그녀의 등장은 그 자체로 무대였고, 주변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쏠렸다. 파티장 너머에서 그녀를 발견한 이는 바로 신상옥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무려 8년 전 홍콩에서 납북된 뒤 생사조차 알 수 없던 또 한 사람, 최은희가 함께였다.
신상옥은 가장 먼저 김지미에게 다가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채 인사를 건넸고,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최은희를 향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한국 영화사의 주인공 세 사람이 다시 마주한 것이다. 김지미는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다가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던 친구들이 눈앞에 서 있는 현실에, 오랜 세월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그 순간 폭발하듯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김지미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과거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여위어 있었고, 특히 최은희는 납북 당시 착용했던 두꺼운 안경을 여전히 쓰고 있었다. 검은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최근 담석증 수술을 받은 후유증 탓에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이야기 도중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은희는 김지미의 손을 꼭 붙잡고 끊임없이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언니 최경헌, 동생 최경옥 감독, 그리고 자녀들의 근황까지 일일이 묻는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때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김지미를 꼭 껴안거나 그녀의 뺨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는 등, 더 이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배우가 아닌, 모든 것을 앗긴 세월 속에서 마음을 붙들고 살아온 한 여인일 뿐이었다.
신상옥 감독 역시 말을 아끼면서도,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북한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영화를 제작해 오며, 어느새 500만 달러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지미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려는 듯, 장난기 어린 말투로 ′그 정도 빚은 제가 갚아드릴게요′라며 한국으로 함께 돌아가자는 농담 섞인 진심을 건넸지만 서로는 알고 있었다. 그 웃음 뒤에 얼마나 많은 절망과 무력감이 숨어 있는지를. 그 제안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의 대화는 북한에서의 생활보다 한국 영화계, 가족, 과거의 추억에 초점이 맞춰졌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북한 감시원이 동석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그날 파티는 초청된 각국 영화인들만 참석할 수 있는 비공개 행사였기에, 외부의 시선은 제한적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오랜만에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재회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파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김지미는 이 짧은 만남이 너무 아쉽다며 최은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최은희는 ′들릴 데가 있다′며, 김지미가 머물고 있는 호텔 방 번호만을 묻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별은 허무하고도 급작스러웠다. 하지만 그날 밤, 김지미의 호텔로 최은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 후로도 베를린을 떠나기 전까지 세 차례나 전화를 걸어왔고, 마지막 통화에서는 더욱 지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미야,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지 않니...
한편, 이 감정의 순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북한에서 파견된 감시원 네 명이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특히 감시원들은 이들이 한국 영화인들과 마주쳤을 때, 과연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돌발 행동을 보이진 않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어쩌면 훈련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한국의 옛 동료들을 마주한 순간에도 겉으로는 크고 분명한 흔들림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의 물결은 분명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절제된 언행과 조심스러운 태도로 감추었고, 대화의 내용도 철저히 가족이나 영화 이야기 등 비교적 무난한 주제에 머물렀다. 감시원들의 눈에는 이 두 사람이 이미 북한 체제에 익숙해졌으며, 자신들이 지시한 범주 안에서 안정된 상태로 행동하고 있다고 판단되었고, 그날의 장면은 평양으로 상세히 보고됐다. 그 보고를 접한 김일성과 김정일은 마침내, 오랜 시간 공들여 길들여온 이 두 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자신들의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허상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북한 체제에 완전히 길들여진 적이 없었고,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자유와 진실에 대한 갈망이 살아 있었다. 감시의 강도는 이후 다소 완화되었지만, 억압과 통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한국으로 돌아온 배우 남궁원과 김지미는 베를린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상황을 언론에 상세히 알렸다.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북한의 체제 선전에 철저히 길들여져 완전히 그들의 사람이 되었다는 보도는 국내 독자들에게 큰 충격과 깊은 배신감을 안겼으며, 일부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나 그들의 처절한 연기 속에 숨겨진 진심을 헤아린 이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대중은 그들의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두 사람에게 또 다른 형태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사건 이후, 김정일의 태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달라졌다. 두 사람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허락했고, 해외 부부 동반 일정도 점차 빈번하게 가능해졌다. 이는 김정일이 두 사람에게 보낸 최고의 신뢰의 증표이자, 북한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야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북한이 오스트리아 빈에 운영하던 비밀 은행인 ′금별은행′에 미화 230만 달러를 신상옥 명의로 예치하며, 마음껏 영화 사업을 하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돈은 단지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된 삶으로부터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절박한 탈출 계획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때부터 신상옥은 탈출 계획을 더욱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회가 단 한 번 뿐일 것임을 직감하고, 매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해외 일정 중 만나는 사람들의 동선, 경호원들의 습관,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까지 모든 것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분석했다. 모든 준비는 극비리에, 그리고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정일은 두 사람에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국제 영화제 참석을 허가했다. 이는 그들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으며,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이 결실을 맺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귀환까지의 긴 여정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신상옥·최은희 부부에게는 그날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운명의 날이었다. 수년간의 강제 억류와 집요한 감시, 조국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 그리고 무너진 자존심 속에서도 오직 탈출을 위해 견뎌낸 처절한 연기의 끝에, 마침내 오늘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날 정오 무렵, 그들은 평소 교류가 있었던 일본 교도통신 특파원 ′에노키 아키라 기자′에게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며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북한 감시원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본 영화제작사 대표들과 오찬 논의가 있다′고 알리며 숨을 죽인 채 움직였다. 이 단 한 번의 기회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절박한 믿음 하나로, 그들은 마지막 용기를 짜내었다.

12시 30분경, 에노키 기자는 실제로 일본 제작사 대표 행세를 하며 비엔나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두 대의 택시를 불렀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와 에노키 기자는 첫 번째 택시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네 명의 북한 감시요원은 두 번째 택시에 나뉘어 탑승했다. 택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에노키 기자는 유창한 독일어로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지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따라오는 택시를 따돌려주세요!
그리고 기적처럼, 비엔나 시내의 어느 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신호등이 붉게 바뀌었고, 뒤따르던 감시원들의 택시는 멈춰 서야 했다. 에노키 기자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택시기사를 향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미국 대사관으로 가달라′소리쳤다.
오후 1시, 택시가 미국 대사관 정문 앞에 멈춰 서자,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최은희는 절박함에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도 뒤 따라 잡힐까 두려운 마음에 몸을 던지듯 대사관 철문으로 향했다. 그 철문은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동으로 스르륵 열렸고, 신분증 확인이나 어떠한 신원 조회도 없이 미국 해병대원이 묵묵히 그들을 안으로 안내할 뿐이었다. 곧이어 뒤따라온 북한 감시요원들이 대사관 앞에 도착하여 소란을 피웠으나, 부부는 이미 대사관 지하의 작고 어두운 공간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눅눅한 공기,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그곳에서 약 15분,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계단 아래로 턱수염이 덥수룩한 미국 외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엔 시원한 오렌지 주스, 다른 손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오렌지 주스를 신상옥에게, 장미꽃은 최은희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는, 지난 8년의 고통과 억압을 조용히 무너뜨리는 데 충분했다.
Welcome to the West.
그날 오후 4시, 부부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완벽한 변장을 했다. 가발, 검은 뿔테 안경, 두꺼운 머플러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미 대사관 차량에 조용히 올라탄 그들은 외교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사관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차량은 비엔나의 국경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맹렬히 이동했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차량 번호를 미리 확인한 출입국 관리소는 아무런 제지 없이 빠르게 차를 통과시켰다.
3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앞 유리에 쏟아지는 눈을 와이퍼가 천천히 밀어내는 그 순간, 그들은 마침내 북한이라는 거대한 무대 밖으로, 진정한 자유가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 신 감독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제3국을 거쳐 미국 수도 워싱턴 D.C. 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들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었으며, 기나긴 납북 생활의 막을 내렸다.
미국 망명, 새로운 삶의 시작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신상옥·최은희 부부, 하지만 탈출했다고 해서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선 ′자진 월북설′이 퍼지며 두 사람을 의심하는 시선이 팽배했으며, 국제적인 관심과 함께 북한의 보복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북한은 이들 부부의 목숨에 미화 5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고, 이에 CIA에서는 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확보하기 위한 철저한 경호에 돌입했다.
부부는 워싱턴에서 역사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은 두 사람이 북한에서의 8년간의 생활과 탈출 과정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북한에서의 생활과 김정일의 영화 제작 관여, 그리고 탈출 과정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특히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는 9시간 30분에 걸친 장시간의 증언을 통해 북한 내부 실상과 김정일의 개인 생활에 대한 폭로가 이루어졌다. 이 증언 내용은 녹음테이프로 기록되었으며, 당시 언론에 의해 ′김정일 개인 생활 폭로′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망명 초기, 부부는 CIA의 보호 아래 생활했다. 비록 물리적인 자유는 얻었으나, 지난 세월의 트라우마와 여전히 존재하는 북한의 위협은 그들의 일상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자진 월북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기에, 부부는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는 망명 후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납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할리우드 관계자들과 접촉하며 재기를 모색했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10년 이상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신상옥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사이먼 신(Simon Shee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영화 제작을 시도했다. 그는 닌자 영화인 <3 닌자> 시리즈를 제작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며, 이는 그가 어떤 환경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대한민국으로의 귀환과 재기
1989년 5월, 그들은 10여 년에 걸친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귀국 당시, 대한민국 사회는 이들의 생환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언론은 연일 그들의 귀환 소식을 대서특필하였고, 공항에는 수많은 취재진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함께 안도감을 드러냈다. 귀국 직후,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그동안의 납북 사실과 북한에서의 생활, 그리고 목숨을 건 극적인 탈출 과정을 상세히 증언했다.

특히 그들은 김정일의 지시로 자신들이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었음을 역설하며, 자진 월북이라는 오명을 벗고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당시 냉전 시대의 어두운 단면과 북한 정권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다시금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들의 파란만장한 삶에 깊은 감동과 함께 충격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오해는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귀국 후에도 신상옥 감독은 영화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한국 영화계에 다시금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독특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예술적 자양분으로 삼아 여러 작품을 연출하며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과거 ′신필름′의 명성을 되찾고자 노력하였으며, 한국 영화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1990년에 제작된 영화 마유미가 있다. 1987년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수백 명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 북한 공작원 살인마 김현희의 실화를 바탕으로, 신상옥 감독이 탈북 후 만든 가장 의미 있는 영화 중 하나였다.
최은희 또한 배우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기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든든한 동반자로서 그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영화계의 원로로서 후배 양성과 영화 교육 분야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에 찬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선 시대적 소명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삶은 단순한 영화인의 여정을 넘어, 현대사의 아픔과 이념 대립 속에서 예술혼을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숭고한 투쟁 그 자체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탈북자도, 전향자도 아니었다. 강제 납치되어 예술이라는 족쇄에 갇혔던 희생자이자, 그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으며, 냉전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증언자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신상옥은 2006년에 세상을 떠났고, 최은희 또한 2018년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인생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이었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은 한 편의 거대한 서사이자, 독재의 광기와 예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의 산물이었다. 진정한 예술의 의미는 그들이 8년간의 포로 생활 속에서 매일 밤 마주했던 평양의 허공 속에 남아 있다. 김정일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연민하고, 예술은 그들을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