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헤어진 연인을 만난다면

2025. 7. 15. 06:32문화예술

 

1976년, 예술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그 한적한 갤러리의 한켠에서 두 명의 예술가가 마주쳤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리고 서독 출신의 울라이.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첫 시선은 마치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겼다.

 

마리나는 울라이의 깊고 날카로운 눈빛 속에서 자신과 닮은 예술적 고뇌를 읽어냈고, 울라이는 그녀의 강렬한 아우라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 삶의 궤적을 지녔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라는 본질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 그들은 각자가 추구해온 예술적 방향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를 매개로 한 퍼포먼스,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 이 모든 화두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두 사람은 더 이상 분리된 예술가가 아닌 하나의 예술적 실체로 결합될 수 있음을 직감했고, 그날 이후, 마리나와 울라이는 암스테르담에서 함께 생활하며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공간 속의 관계 Relation in Space (1976)

<공간 속의 관계 (Relation in Space)> (1976) ⓒMarina Abramović

 

서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며 반복적으로 몸을 부딪히는 퍼포먼스를 통해, 두 사람은 남성과 여성의 에너지를 충돌시켜 제3의 존재인 ‘그 자아(that self)’를 창조해내고자 했다. 이 작업은 연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자아와 기대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충돌은 관계의 역동성과 복잡함,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때로는 신체적 고통을 수반했지만, 이 퍼포먼스는 인간 관계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색하며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Relation in Time (1977)

<시간 속의 관계 (Relation in Time)> (1975) ⓒMarina Abramović

 

이탈리아 볼로냐의 스튜디오 G7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으로,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묶어 물리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 행위는 17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는 관계 내에서의 시간의 흐름, 인내, 그리고 심리적 한계를 탐구하는 의도를 지녔다. 두 예술가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고정된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관계의 지속성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물리적 제약과 시간의 흐름을 통해 관계의 본질과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을 조명했다.

 

숨 들이쉬기·내쉬기
Breathing In·Breathing Out (1977–78)

<숨 들이쉬기/내쉬기 (Breathing In/Breathing Out)> (1977) ⓒMarina Abramović

 

마리나와 울라이가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 예술가가 서로 마주 보고 무릎을 꿇은 채, 각자의 코에 상대방의 입을 대고 서로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거의 20분 동안 서로의 숨을 소비하며 밀접하게 연결된 상태를 유지했다. 

이 행위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탐구하며,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인 호흡을 통해 타인과의 극단적인 상호 의존성을 시각화한다. 두 예술가는 서로의 숨을 공유함으로써 개별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기능하며, 이는 관계의 깊이와 잠재된 위험을 동시에 드러낸다. 또한, 이 퍼포먼스는 궁극적으로 산소 부족으로 인한 의식 상실에 도달함으로써, 관계의 종착점이나 한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중력 Imponderabilia (1977)

<무중력 (Imponderabilia)> (1977) ⓒMarina Abramović

 

둘은 나체로 문틀 양쪽에 서 있었고, 전시실을 가기위해선 관람객은 무조건 두 사람 사이를 지나야 했다. 누구를 마주보며 지나갈 것인가가 관람자의 무의식과 정체성을 반영했다. 어느 쪽으로 몸을 돌려 통과할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 물론 이 퍼포먼스를 마주한 관객중 일부는 불쾌감을 느끼곤 했지만 그들의 놀라워하는 표정과 부끄럽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제스쳐를 보는 또 다른 관객들은 재미를 느끼기도하는 작품이다. 원랜 약 6시간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던 작품이었지만,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여 3시간만에 마무리되었다. 

점점 어른이 될 수록 우리는 '나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된다. 부끄러움의 기원과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퍼포먼스는 인간의 이런 본연의 감정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특성을 주목한 작품이다. 신선하고 독특한 발상, 마리나와 울라이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퍼포먼스가 되었다.
 

빛과 어둠 Light and Dark (1978)

<빛과 어둠 Light and Dark> (1978) ⓒMarina Abramović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구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어두운 공간 속, 오직 얼굴만을 밝히는 조명 아래 약 70명의 관객이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마주 앉아 약 20분 동안 번갈아 가며 서로의 얼굴을 때리기를 반복한다. 이는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반영하지만, 단순히 물리적 고통이나 해악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권력과 상호작용, 감정의 흐름을 탐색하는 데 초점을 둔다. 폭력이라는 행위가 단지 파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상황이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어떤 전환점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그 상징성과 긴장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AAA - AAA (1978)

<AAA - AAA> (1978) ⓒMarina Abramović

 

이 작품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장시간 소리를 지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지며, 마침내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밀착한다. 퍼포먼스는 두 연인이 평등한 위치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서로를 압도하려는 긴장감으로 전개되며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힘의 균형과 긴장감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발성과 마주 보기라는 행위를 통해,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감정적·신체적 대면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동시에, 소통의 가능성과 그 한계, 그리고 관계 내 권력 역학을 시각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원래는 텔레비전 방송을 위해 제작된 이 퍼포먼스는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의 대표적 협업 중 하나로, 인간 관계의 본질과 비언어적 소통의 형태를 심도 있게 고찰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휴식 에너지 Rest Energy (1980)

<휴식 에너지 (Rest Energy)> (1980) ⓒMarina Abramović

 

이 작품은 1980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국립 갤러리에서 열린 ROSC'80 행사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로, 활과 화살을 이용해 극도의 긴장감과 신뢰를 시각화한 대표작이다. 퍼포먼스에서 마리나는 뒤로 기울인 자세로 활을 들고 있었고, 울라이는 화살을 당긴 채 그 끝이 그녀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다. 화살이 발사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유일한 힘은 두 사람의 균형과 신체적 긴장감뿐이었다.

이 짧은 4분 10초의 퍼포먼스는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마이크를 통해 증폭되며 생생한 긴장감을 전달했고, 단순한 정적 구도 속에서도 관객은 숨막히는 몰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이 퍼포먼스를 자신의 작업 중 가장 어려웠던 작품 중 하나로 꼽았으며, 이 작품은 신뢰와 위태로움, 관계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밤바다 건너기
Nightsea Crossing Conjunction (1983)

<밤바다 건너기 (Nightsea Crossing Conjunction)> (1983) ⓒMarina Abramović

 

두 사람의 대표적인 협업 시리즈인 <Nightsea Crossing>의 일부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전 세계 19개 지역에서 총 22회에 걸쳐 진행된 장기 프로젝트 중 하나다. 그중 <Conjunction>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버전은, 다른 문화와의 연결과 교류를 시도한 특별한 퍼포먼스로, 실제로 호주 원주민 샤먼과 티베트 라마승이 함께 참여해 수행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퍼포먼스에서 두 사람은 테이블 양 끝에 마주 앉아 오랜 시간 완전한 침묵과 부동의 상태를 유지한다. 관객 없이 이어지는 이 정적인 행위는, 육체적 금식과 정신적 고요함을 동반하며 약 90일간 지속되었다.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 시간과 인내의 개념, 신체와 의식의 한계, 그리고 타문화와의 깊은 교류를 탐색한 실험적이고도 상징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연인들 The Lovers (1988)

<연인들 (The Lovers)> (1988) ⓒMarina Abramović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각자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출발해 중간 지점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하는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는 데만 무려 8년이 걸렸고, 그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의 사랑도 서서히 식어갔다. 결국 1988년, 이미 관계가 끝난 상태에서 이 퍼포먼스를 실행에 옮겼다. 마리나는 황해에서, 울라이는 고비 사막에서 출발해 약 3개월 동안 걸었고, 만리장성 중간에서 만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연인들 (The Lovers)> (1988) ⓒMarina Abramović


긴 여정 끝에 서로를 마주한 자리에서, 마리나는 울라이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을 듣는다. 여정 중 울라이가 함께 동행한 통역사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야기는 마리나에게 큰 충격과 깊은 배신감을 안겼지만, 그녀는 마지막 인사에서 ′그녀와 아이를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울라이는 그 아이와 몇 년간 가족처럼 지내다가, 결국 그 관계도 정리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퍼포먼스는 단순한 이별을 넘어, 예술과 인생, 사랑과 상실이 얽히며 감정의 절정에 이른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The Artist is Present (2010)

뉴욕 MoMA에서 열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대규모 회고전에는 약 85만 명이 다녀가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마리나 본인이 직접 참여한 <The Artist is Present>는 하루 종일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관람객 한 사람씩 마주 보며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친다. 무려 736시간 30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수백 명의 사람들과 침묵 속에서 깊은 교감을 나눈다. 누군가는 멍하니, 누군가는 미소를 띠며, 또 누군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사람의 눈은 그 자체로 수많은 감정을 말해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남성이 자리에 앉았다. 바로 20년 전 결별한 연인이자 오랜 협업자였던 울라이였다. 마리나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금세 눈물이 맺혔다. 울라이는 말없이, 마치 ‘잘 지냈냐’고 묻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침묵 속에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사랑과 상처, 그리움과 이해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마침내 마리나는 퍼포먼스의 규칙을 깨고 울라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짧지만 깊은 감정의 교류였다. 순간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오랜 시간 얽히고설킨 두 사람의 관계가 이 단 한 장면으로 응축되며 깊은 울림을 전했다. 이 장면은 영상으로 공개되어 전 세계에 감동을 안기며, 현대 퍼포먼스 예술의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다시 어긋난 두 사람, 그리고

2015년, 울라이는 마리나를 상대로 네덜란드 법원에 저작권 관련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이 1999년에 공동 창작한 작품에 대한 계약을 마리나가 위반했고, 적절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마리나가 작품에서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네덜란드 법원은 마리나에게 소송비용 약 2만 3천 유로와 로열티 약 25만 유로를 울라이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리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멀어지는 듯 보였다.

Ulay and Marina Abramović at the opening of <Ulay: Renais Sense> in New York, 2018. ⓒ artnet.com

 

하지만 2017년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서 열린 마리나의 회고전에서 두 사람은 화해했다. 울라이는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을 축하하자′며 평화롭게 관계를 마무리하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오랜 갈등을 뒤로하고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이후 울라이는 2011년 림프암 진단을 받았으나 2014년에 회복했으나, 2020년 3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암 재발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마리나는 SNS를 통해 전 연인인 울라이를 추모했다. 죽어서도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예술. 그 것이 두 사람이 지향했던 예술의 방향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늘 나의 오랜 친구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울라이의 부고를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이자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그리운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
그가 남긴 예술과 유산이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느낍니다.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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